[이상홍의 원전 없는 나라] '참사'와 '사고' 사이

관리자
발행일 2022-11-21 조회수 20


이상홍 사무국장님이 <민중의 소리>에
[이상홍의 원전 없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연재합니다.
https://www.vop.co.kr/A00001623473.html
 



‘참사’와 ‘사고’ 사이



경주역 광장에도 ‘이태원 참사 경주시민 분향소’가 차려졌다. 필자도 시민 상주를 맡았다. 어느 시민은 분향을 마치고 “자식을 잃는 건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이다”라고 뒷말을 남겼다. 자녀가 당일 이태원에 있어서 뉴스 속보를 보며 애간장을 태웠다고도 했다. 분향소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크게 써 붙였지만, 도무지 어떻게 애도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이 죽었을 때 사건의 원인에 따라 ‘참사’ 또는 ‘사고’로 부른다. 더 근본적으로는 죽음의 규모를 두고 참사와 사고를 나눈다. 우리는 많은 죽음이 발생하는 사건을 자연스럽게 참사라고 부른다. 정부에서 ‘사고’라고 지침을 내렸음에도 보수적인 경주지역 곳곳에 걸린 자생단체의 현수막조차 참사라고 적었다. 참사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라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면, 반드시 사회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각보다 강인해서 허망하게 마감하지 않는다. 다수의 희생 뒤에는 반드시 사회 시스템의 실패가 주요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단 한 명의 희생도 사회 시스템의 오류로 발생할 수 있다.
규모로 보면, 핵발전은 단순 사고조차 참사로 나아갈 경향이 매우 짙은 위험 시스템이다. 후쿠시마 핵사고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여겨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인재로 밝혀졌다. 애초에 지진이 다발하는 지역에 핵발전소를 건설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또한 비상시에 발전소 안전 유지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는 비상디젤발전기도 지하에 설치해서 쓰나미에 잠겨 가동하지 못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안전설계다.
지난 10월 지진 관련 중요한 보도가 두 건 있었다. 하나는, 2016년 9월 12일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을 일으킨 단층이 ‘내남단층’으로 밝혀졌고, 여기에서 규모 6.0 이상의 지진도 발생할 수 있다는 뉴스다. 다른 하나는, 내남단층과 불과 10km 거리에 지진 가능성이 큰 활성단층 2개가 더 발견됐다는 뉴스다. 모두 정부의 지진 조사 내용을 연속 보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정치 이슈에 밀려 추가 보도 없이 언론에서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 때가 생각난다. 월성원전 1호기 수명연장을 검토하면서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것을 했다. 월성원전 1호기는 ‘지반가속도 0.2g’(규모 6.5)의 지진 충격에 견디도록 설계됐다. 만일 설계기준인 0.2g보다 더 큰 지진 충격을 받아도 방사능 누출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스트레스 테스트다. 국민을 안심시키려고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후쿠시마 후속 대책이었다. 물론 핵발전소에 진짜 충격을 가할 수는 없고 서류상 여러 평가를 한다.
당시, 스트레스 테스트에 적용할 지진 규모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는 0.3g(규모 6.9)의 지진을 고집했고, 시민사회는 최소 0.4g(규모 7.1) 이상의 지진 평가를 주장했다. 2014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지진에서 안전하다는 사회적 암묵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0.3g 적용을 밀어붙였다. 2015년 2월 박근혜 정부는 월성원전 1호기 수명연장을 승인했다.
그러나 2016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발했고, 일 년 뒤 규모 5.4의 지진이 포항을 강타했다. 이제 누구도 대한민국을 안전한 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핵발전소는 여전히 0.3g를 적용해서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반짝하고 사라진 두 건의 지진 뉴스는 너무 아쉽다. 후속 보도가 계속 이어져 우리 사회의 ‘호루라기’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될 뉴스다.
불국사 석가탑을 1966년 보수하면서 ‘묵서지편’이라 불리는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묵서지편은 40년이 지난 2007년에 판독을 마쳤다. 묵서지편에 따르면, 고려 초창기인 1024년과 1038년 두 차례나 석가탑이 지동(地動)으로 무너져 다시 세웠다. 지동은 요즘으로 말하면 지진이다. 석가탑 모형을 만들어 지진 충격을 가하면 0.4g 이상의 지진에서 무너진다.
일본의 민초들은 오래전부터 쓰나미가 휩쓸고 나면 비석을 세워 물이 찬 지대를 표시했다. 일명 ‘쓰나미 비석’이다. 근대에 들어 조상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쓰나미 비석 아래에 도시를 만들고 핵발전소를 건설해 큰 참사를 불러왔다. 석가탑의 묵서지편이 자꾸만 일본의 쓰나미 비석처럼 보인다. 어느 날 경주의 핵발전소에서 변고가 발생하면 사고일까? 참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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